09. 바람이 불어오는 곳, 하나
1960년대 카메룬은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 카메룬이 한국보다 형편이 나았다는 자료가 말해준다. 그래도 가난하기론 도토리 키재기여서 둘 다 세계 최빈국에 속했다. 이어령 선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1985년, 봄이 여름으로 가는 계절에 삼중당 문고로 읽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이어령 선생이 이탈리아와 스위스, 프랑스 등 여러 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고 쓴 인문 기행서다. 선생의 연보에 따르면 1975년 2월에 책으로 나왔다. 책 속의 여러 단서를 종합하건대 여행 시기는 선생의 1964년 경향신문 유럽 특파원 시기와 겹친다.
선생이 ‘해외여행은 다섯 가지 복 중 하나’라고 한 1964년 그 당시 서유럽은 우리에게 불어오는 바람의 땅이었던 모양이다. ‘축소지향의 일본인’ 같은 수많은 책을 쓴 이어령 선생은 세기를 뛰어넘어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이다.
서울올림픽 개ㆍ폐막식 총감독과 초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책을 읽으면서도 가볼 생각조차 못 하던 그 바람이 불어오는 땅을 선생의 해박한 지식을 타고 붓이 캔버스를 터치하듯 상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선생이 프랑스에서 별 한 개짜리 하급 호텔에 머물 때 밤에 물을 사러 나갔다가 유리문에 머리를 박고 창피했다는 일화와 한국의 보통 월급쟁이 1년 연봉에 해당하는 4백 불짜리 개를 데리고 공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에게 잡히면 놓아주질 않아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정도만 붙잡고 있었다. 1989년에야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됐다.
2018년 서울소방학교가 은평구 물푸레골로 이전하면서 골방 같은 도서실에 묵혀있던 오래된 책들이 버려졌다. 곧 폐지가 될 책 무더기 속에 그 운명에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누런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다시 읽으며 불어오는 바람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 눈에 꽂혔다. 쪽마다 젊은 지성이 토로하는 열등감과 자괴심이 빛바랜 활자 속에 촘촘하게 강렬히 박혀있었다.
“떠날 때는 그렇게도 멋있고 견고해 보였던 국산 신품 트렁크가
유럽에 도착하기 전 형편없이 파손되어 있었다.
외국인 짐짝들과 비행하고 있는 동안 별수 없이 자신의 그 허약성을 드러내 놓고 만 것이다.
그 트렁크를 만든 한국의 메이커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차라리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파손된 건 트렁크만이 아니었다. 여행 기간 내내 젊은 이어령도 자학의 깊은 상처를 달래야만 했다. 갓 서른의 이어령이 본 로마와 서울은 이랬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호흡하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로마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고궁과 시가가 서로 외면하고 있는 서울 거리의 풍경이 유난히 비참하게 생각되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덕수궁과 시청과 그리고 뉴코리어 호텔을 바라보는 그 기분은
거의 고문에 가까운 것이다”
“콜롯세움은 7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극장의 수용 인원은 3천을 넘지 못한다”
당시 로마 1년 관광 수입액은 대한민국 전체 수출 총액의 세 배를 넘었다. 챗지피티 선생이 알려준 1964년 대한민국 인구는 2천8백만 명쯤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포함된 대한민국 사람들이 1년에 수출해서 2억 불을 벌 때 로마에는 관광객이 뿌린 7억5천만 불이 떨어졌다.
이 돈에 이탈리아 소매치기와 사기꾼이 관광객 주머니를 턴 돈도 포함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태리 사기꾼들 모두 뒤가 없이 명랑하였고 순진하였다. 우리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음흉스럽지도 않다. 이태리에는 도둑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에 비하면 그지없이 천진하고 단순, 솔직하다”
이어령에게는 이들의 범죄마저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처럼 경쾌하게 보였나 보다. 그는 피렌치 베키오 다리를 보며 청계천 변에 늘어섰던 판잣집을 떠올렸고 성 조반니의 축제일 플로렌스 밤하늘 불꽃놀이에 ‘독재자 이승만 생일에야 겨우 선심으로 몇 발의 꽃불을 감상할 수 있었던 서울 시민’으로서 죄책감과 슬픈 생각, 분한 마음이 들었다고 적었다.
큐리 샤뮤 구급대원 교육 때 오래전 청계천 판잣집 풍경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기가 카메룬 어디인가요?”하고 물었다. 갑론을박하더니 야운데 봉비(Mvog Mbi)라고 한다.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더러운 개천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판잣집, 맞은편엔 쓰레기 더미가 검은 물을 따라 늘어선 곳이다.
청계천 판잣집 사진과 현재 사진을 비교한 슬라이드를 올렸다.
“여기는 야운데 봉비가 아닌 서울의 청계천입니다. 대한민국도 과거엔 이랬습니다.
저는 카메룬도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얼굴과 눈동자에 놀라움과 실소, 회의가 교차한다. 강의실에 퍼진 큐리 사뮤 구급대원들의 묘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61년 전 젊은 이어령도 사뮤 구급대원들처럼 이런 기분이었을까? 궁금해졌다.
“평화로운 이 프로방스의 전원도시를 바라볼 때 자꾸 나의 망막을 스쳐 가는 풍경은
절량농가와 동굴 같은 초가집과 그리고 멍든 표정으로 살아가는 한국의 농촌이었다.
대체 그게 인간의 생활이라 할 수 있느냐?”
“이 사람들은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데.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마다 거꾸로 가슴이 우울해집니다”
젊은 지성의 날카로움은 프랑스 샤모니와 남산 케이블카 줄의 굵기를 놓치지 않는다.
“4천 미터의 샤모니 케이블카 줄보다 오히려 10분지 1밖에 안 되는
3백 미터의 남산 케이블카 줄이 더 굵게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아이러니다”
선생의 말대로 자연미밖에 없는 스위스에선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의 10배를 더 넘는 1593불이라면서 ‘우리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인 한 사람이 1년 소득이 160불 이하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차이가 지성의 날카로움마저 무디게 만든 것일까? 1948년 제헌헌법부터 대한민국 여성에게 보장된 투표권이 열 배가 넘는 소득의 스위스 여성들에겐 아직도 없다는 사실만 언급되고 걸러진다.
“스위스 사람들은 친절하다. 그러나 우리의 친절, 우리 시골 사람들이 무엇인가 피해망상에 걸려
비굴에 가까운 몸짓으로 베푸는 그런 친절은 아니었다”
1964년 이어령에게 스위스 사람들은 친절하고 모두 평화주의자다. 2025년 지금 이어령 선생의 이와 같은 평가에 동의할 대한민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외부에서 부는 바람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나라가 아니라 바람의 진원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어령의 자학을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서로 이해하고 싶다.
“연탄재가 널려있는 골목길에서 솜사탕이나 사 먹고 손으로 돌려주는 생철비행기를 타며 놀고 있는,
그리고 어두운 아편굴 같은 데서 조잡한 만화를 읽는 한국의 그 아이들이 너무나 비참하게 생각되었다”
이게 이어령의 진심 아니었을까? 야운데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다. 구걸하는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더 많다. 이어령 선생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탐색할 때 우리 부모님은 신혼이었다. 60년대생인 나는 카메룬에서 과거 한국의 모습을 자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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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운데 대형 쇼핑몰 카르푸와 내부 식품 매장. 카메룬 야운데도 여러 얼굴이 있다. |
이어령은 프랑스 여행 중 195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와 모리악과의 인터뷰를 마치며 작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아마 또 저처럼 젊은 어느 한국의 문학도가 파리를 방문하게 되겠지요.
그때는 불란서 문학이 한국에서 읽혀지듯
한국의 문학이 불란서에서도 많이 읽혀지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남쪽 코리아지요?”라고 묻던 노작가에게 섭섭했다던 이어령이 남긴 이 말이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고인이 되신 젊은 이어령의 소망대로 됐다.
![]() ▲ 닥터 메토고 깜바 고향 집 정원에서 바나나를 따고 일곱째 아들 이탄(Ethane)과 자전거를 타며 놀았다. 오랜만에 행복했다.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 프로젝트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기 전 깜바 집에서 며칠 쉬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메토고 부친과 메토고가 그러라고 스스럼없이 허락했다. |
문학만이 아니다. 선생이 ‘신경질 난 고양이처럼 외치다가 일약 세계의 총아가 되었다’고 평한 비틀즈보다 더 ‘신경질’을 내는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POP 가수들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지 오래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멋있다. 고등학교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뜻도 모르면서 흥얼거리며 자란 나에게 지금 젊은 세대는 매력적이다. 프랑스와 모리악의 고국 프랑스에서 영부인 마크롱 여사가 주최한 2022년 연말 갈라쇼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블랙핑크는 멋졌다.
블랙핑크의 공연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어린 소녀가 황홀한 동경의 표정으로 블랙핑크를 바라보는 모습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바람이란 이런 게 아닐까?
![]() ▲ 2025년 K-POP World Festival이 8월 27일 야운데대학교 올림피아 극장에서 열렸다. |
1964년 스위스와 열 배 차이가 나던 1인당 소득도 그 격차가 2~3배로 줄었다. 한국은 이제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바람을 만들어 가는 나라가 됐다. 카메룬 야운데에서 현지 매니저로 일하면서 그 바람을 느낀다.
코이카 연수를 갔다 온 큐리 병원 아부와 모니크에게 소감을 묻자 “한국, 정말 아름다운 나라야! 카메룬과 한국은 비교 불가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의사 음본도는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했고 큐리 원장 닥터 월롱은 연수 기간 중 보고 배운 걸 큐리에 이식하느라 바쁘다.
이들이 자학의 상처 없이 카메룬의 미래가 됐으면 좋겠다. 물론 1964년에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스위스처럼 왜 한국에 어둡고 추한 모습이 없겠는가?
내 조국이 선한 바람을 더 세게 만들어 가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카메룬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 구축 프로젝트도 바람이 되길 소망한다.
유기운
서울에서 생계형 소방관으로 30년 근무했다. 현재 소방관 인생을 마무리하고 갑자기 아프리카로 튀어 카메룬 야운데에서 코이카 병원 전 응급의료체계(EMSS) 구축 프로젝트 현지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PMC_ 유기운 : waterfire119@naver.com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6년 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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