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현장에서 당황하고 쫄면 네가 구조해야 할 사람은 널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어?”
“죄송합니다”
“네 몸에 못이 박히고 등이 타들어 가도 현장에선 절대 당황하거나 힘든 표시 내지 마”
곽경택 감독의 영화 ‘소방관’ 속 대화다. 그렇다. 소방관이 현장에서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게 바로 ‘감정’이다. 피가 쏟아져 내리고 비명을 지르는 구조대상자 앞에서 소방관은 냉정하고 차가워져야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2년 전 광주소방학교 사무실에서 전해 들었던 특수부대 출신 소방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화 속 모습과 그때의 상황은 달랐지만 대화의 내용이 놀랄 만큼 똑같았다.
해군 특수부대 출신 A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비슷한 또래 대부분이 대학의 낭만에 젖어 있을 때 펜을 잡는 대신 수경을 썼고 그의 손엔 총과 칼이 들려있었다.
목표는 단 하나. 어떻게 하면 적을 죽이고 내가 살 수 있는지. 4년여 군 복무를 마친 뒤 A는 주황색 제복을 입은 소방관이 됐다.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119구조대가 된 것이다.
“세상 참 아이러니해. 목표가 완전히 바뀐 거잖아. 그런데 사람 살리는 게 무섭더라”
“그러게. 누군가를 죽인다는 게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지만 사람을 살린다는 것도 무서워.
현장에 가면 다들 우리만 지켜보고 있잖아. 나도 떨리는데 말이야”
현장은 녹록지 않다. 추락, 자살, 절단, 교통사고 등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A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손과 발은 통제되지 않고 떨리기만 했다.
그 후 A는 출동지령만 들어도 끔찍한 현장이 그려졌고 괴로운 나날이 계속될 때 주황색 제복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딸린 식구를 생각하면 선택지는 없었다.
“괴로움을 견디며 일하는 게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지 경험해 본 사람만 알아”
“힘든 일이지.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감정도 고장 나. 참혹한 현장도 점점 무덤덤해지고….
근무하면서 내가 훈련되고 단련된 줄 알았는데 병들고 있더라고.
가족이랑 있어도 감정의 변화를 못 느껴. 그래서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했던 거야”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데 그 감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인간이 당연히 느껴야 할 기쁨과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이 점점 말라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는 일정 근무를 한 소방관에게 안식년을 준다고 하던데… 우리도 필요하지 않겠어?”
“안식년? 그거 몇 년 전, 우리나라도 법안 발의됐는데… 나 퇴직할 때 있으려나”
“야, 이런 이야기 우리가 100번을 해봐야 아무 의미 없어”
“안식년 준다고 무너진 감정이 회복되겠어?”
그렇게 시시콜콜하면서도 무거웠던 대화가 끝마칠 때쯤 A는 같이 있던 구조대원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깐 내가 줄곧 구조대에 있다가 내근 부서로 옮겼을 때
일은 힘들었어도 성격 밝아졌단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그러면 안식년으로 우리 감정도 회복되지 않을까?
소방관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도….’ 이제는 방수복을 입은 채 면장갑을 끼고 화재를 진압하지 않는다. 백업 장비가 마련될 만큼 든든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참혹한 현장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소방관의 감정은 많은 예산을 투입해도 쉽사리 회복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혹 A의 이야기처럼 안식년 도입이 무너졌던 감정을 회복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진 않을까?
<특수부대 출신 구조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글로 정리했습니다.>
광주 남부소방서_ 이태영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5년 3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소방방재신문 (http://www.fpn119.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희로애락 119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