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발생했다는 건 분명 원인이 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이 명쾌하게 밝혀지는 건 아니다. 화재조사관도 사람이기에 원인을 밝힐 수 없는 화재가 있다. ‘분명 저 원인 같은데…’ 하는 정황과 심증은 있으나 화재 원인이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현장도 있다.
그렇다고 심증이나 정황에 따라 원인을 정리하고 규명할 수 없다. 발화지점이나 화재 원인을 심증 또는 정황에 맞춰 규명한다면 선의의 피해자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화재조사관에게 화재 원인 규명이 가져다주는 피해는 없다. 즉 사심에 얽매여 화재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 한 제약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집이나 선입견, 그릇된 판단으로 화재 원인을 규명한다면 크나큰 오류가 발생한다. 발화지점이나 원인에 오류가 발생한다면 연소 피해자는 2중의 피해를 보게 된다.
발화지점 판단이 어려운 화재 현장이 있다. 화재조사관이 모든 현장을 조사해 화재지점과 화재 원인을 100% 정확하게 규명할 순 없다. 아무리 노력하고 논리를 전개해도 발화지점이나 화재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는 현장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발화지점이나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면 떳떳하게 ‘미상’이라는 원인으로 종결함이 마땅하다. 또 미상으로 결론 지을 땐 현장을 최대한 조사하고 세세한 사항까지 보고서 지면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모든 화재 현장엔 분명 원인이 존재하지만 화재조사관이 그 연소 메커니즘을 모두 증명할 수 없다. 화재 현장은 알 수 없는 변수가 많고 돌출되는 허실 증거가 잔류하기 때문이다.
진압 과정에서 잔화 정리를 위해 중장비로 현장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경우, 목조 건물이라 완전히 연소한 경우, 화재 하중이 크게 작용해 건물이 무너져 발굴이 어려운 경우 등 화재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현장이 있다.
어느 해 2월 가구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공장 관계자는 모두 퇴근하고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재는 아침 7시께 시작됐다.
목격자 진술
화재를 목격하고 신고한 김 씨는 버스회사 직원으로 옆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다른 직원에게서 듣고 확인하니 ○○가구공장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다른 목격자는 인근에 거주하는 이 씨다. 자택 전등이 깜빡거리다가 모두 꺼져 집 밖으로 나와보니 ○○가구공장 가운데서 검은 연기와 불꽃이 올라오고 있었다고 했다.
목격자 진술대로 현장을 확인하니 ○○가구공장 가운데 부분에는 화목난로가 있었다. 화목난로 여부를 문의하니 공장 관계자가 “화목난로 불이 꺼진 걸 확인하고 퇴근했다”고 진술했다.
화재 현장으로 소방대가 도착했을 때 공장 중간의 본 건물은 붕괴하고 흰색 연기가 분출하는 형태였다. 광역 화재조사관이 도착했을 땐 소규모 화재로 착각했다.
연소 형태가 작고 흰 연기가 분출하고 있었기에 화재는 쇠퇴기인 것으로 오인했다. 하지만 이미 공장 본 건물은 붕괴했고 측면 비닐하우스 작업장까지 연소하면서 일부만 잔류해 있었다.
화재 현장을 확인하라!
중장비를 이용해 깔끔하게 정리했다. 어떤 건물이 어떻게 축조돼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정리된 현장에서 화재 원인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장이 온전히 잔류해도 화재 원인 규명이 녹록지 않은데 건물의 존재를 흔적도 없이 정리했다면 화재 원인은 고사하고 발화지점도 규명할 수 없다.
현장에 잔류한 목재들로 연소 패턴을 확인하려 했으나 고정된 목재는 발견할 수 없었다. 전부 이동되면서 흐트러진 목재만 널브러져 잔류해 있었다. 연소 방향성보다는 잔류한 공구나 난로 위치를 확인하고자 했다.
화재 현장 중간 지점에서 화목난로와 공구로 사용한 모터가 발견됐다. 다행히 기둥으로 사용한 목재에서 탄화 방향성이 관찰됐다. 목재는 화목난로 방향으로 탄화해 심도가 깊게 형성돼 있었다.
화목난로는 적산화 현상 없이 군청색으로 잔류했다. 군청색으로 잔류했다는 건 화목난로엔 열기가 없었다는 증거다. 통상적으로 화재 현장에 잔류한 화목난로와 같은 철재 구조물 자체가 발열한 상태라면 적색으로 잔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건물이 모두 없어진 현장에서 화재 원인을 논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장 안에 있던 공구도, 구조물도 대부분 변경ㆍ변형된 상태에서 그 원인을 발굴한들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발열 가능한 물건을 확인하라!
화재 현장에서는 화목난로 2개가 발굴됐다. 난로 변색 흔적만으로는 발열하지 않은 상태처럼 보였으나 설치된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연통이 확인됐지만 특이점이 관찰되지 않았다. 연통이 있던 바닥은 장시간 연소한 형태로 탄화 잔류물이 잘게 잔류했다. 물론 연통이 이 자리에 있었는진 알 수 없다. 잔화 정리 과정에서 위치가 변동됐을 수도 있다. 연통만으로 연소 방향이나 난로가 발열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연소 방향성 확인
잔류한 목재에 연소 방향성이 잔류해 있었다. 방향성은 알 수 있으나 발화지점이나 화재 원인은 규명할 수 없다. 목재로만 본다면 사진 우측에서 좌측으로 화염이 진행된 형태고 상단에 스티로폼이 잔류한 형태로 본다면 직접 화염은 작게 작용했던 거로 짐작된다.
관계자는 이곳에 차단기가 설치돼 있었다고 진술했으나 잔류한 흔적이나 형태가 발굴ㆍ확인되지 않았다. 철제 기둥에 일부 전선이 남아 있었지만 이것으로 어떻게 전선이 연결돼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전선에서 용융점은 있으나 전기적 요인인지 화염에 의해 용융된 형태인지 판단되지 않았다.
목격자 진술을 정리하라!
목격자 김 씨는 건물 중간 지점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인근 주택에 거주하는 이 씨는 집안 전등이 깜빡거리고 모두 꺼지는 현상이 있어 밖으로 나와 확인하니 ○○가구공장 건물 가운데 부분에서 검은 연기와 불꽃이 나왔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발화지점은 건물 내부가 맞는데 건물 중간에 화목난로가 있었으나 발열 흔적이 관찰되지 않고 전선이나 차단기는 현장에서 확인할 수 없었다. 목격자 진술대로 건물 내부에서 발화한 건 맞지만 발화지점도, 원인도 발굴할 수 없었다.
원인 검토
관계자 유 씨가 퇴근 시 출입문의 잠금장치를 모두 잠그고 퇴근했다고 진술했다. 화재조사 당시 출입구 잠금장치가 없었고 출입문이 개방돼 있던 점을 고려할 때 방화 개연성은 배제하기 어려웠다.
출입문이 개방됐단 이유만으로 방화 개연성을 논할 수 없다. 이런 부분은 수사기관의 수사에서 확인돼야 할 부분이다. 건물의 멸실로 인해 출입 여부, 인위적 착화 흔적 등을 논할 수 없다.
인근 주택에 사는 이 씨가 전등이 깜빡거려 주택 밖으로 나왔다고 진술했으나 잔류된 전선이나 전기 시설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차단기가 설치돼 있었다고 진술했는데 차단기 잔해를 발굴할 수 없었다.
전기적 특이점으로 특정되는 흔적이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내부에 인명은 없었고 전기는 통전 중으로 전기적 요인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건물이 붕괴하고 잔화 정리 시 중장비를 이용해 진화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관할 조사관의 진술과 잔류된 형태로 볼 때 부주의 개연성을 논할 수 없다.
공장 건물은 목조 건물이었는데 건물의 형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재로 소실됐고 중장비로 잔화를 정리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공장 내부의 공구류나 물건, 물질의 위치가 이동돼 화염 전파 방향성을 확인할 수 없다.
결론
현장에서 관계자와 목격자 진술을 참고해 탄화 잔류물을 확인했으나 화재 원인과 관련해 논할 수 없었다. 중장비로 현장을 정리해 위치가 변동된 이유도 있겠지만 목조 건물이라 연소 시 화재 하중이 크게 작용하면서 방향성도 찾기 어려웠다.
현장에 잔류한 탄화물로는 화재 방향성을 논할 수도, 발화지점을 특정할 수도 없다.
화재진압 측면에서 중장비를 이용해 정리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으나 화재조사관으로선 최악의 조건이다. 현장을 중장비로 정리하니 화재 원인 규명에 관한 책임은 덜 수 있다. 원인 규명의 토대가 되는 현장이 멸실됐으니 원인 규명도 당연히 멸실한다.
화재 현장을 중장비로 정리하니 책임소재가 없어져 홀가분할 수 있다. 그러나 연소 피해자와 연소 확대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2중의 고초를 겪을 수 있다. 화재 현장에서 정확한 원인을 규명한다는 건 파급되는 피해를 줄일 수도, 제2의 피해자를 구원 또는 지원할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기 김포소방서_ 이종인 : allway@gg.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1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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