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승객이 지하철역 승차장에 불을 질렀어요. 빨리 와주세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은 화마와 맞서며 진압에 온 힘을 쏟는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이 삽시간에 번지면서 지하철역 내부를 집어삼켰다.
그 순간 구조작업을 벌이던 소방관 한 명이 사라졌다. 지하 1층에서 고립된 것. 공기호흡기 잔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의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때 짙은 연기를 헤치고 네 명의 소방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름 아닌 신속동료구조팀(RIT)이다.
RIT는 ‘소방공무원 현장 소방활동 안전관리에 관한 규정’에 따라 현장 활동 중 위험에 처한 소방관을 구하기 위해 구성되는 전문 구조팀이다. 현장 투입 소방관이 40초 이상 움직이지 않거나 사고를 당한 소방관이 도움을 요청할 때 즉시 구조작업에 돌입한다.
RIT 제도는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미국방화협회(NFPA)는 소방관의 RIT 역할 수행을 위한 교육 표준인 ‘NFPA 1407’을 개발했다. 이후 미국 소방관서에서 이 표준을 기반으로 표준작전절차(SOP)를 만들거나 RIT 임무 수행 시 참고한다.
우리나라는 경기소방재난본부가 2008년 9월 RIT 운영을 시작하면서 처음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2021년 6월 17일 경기 이천 쿠팡 덕평물류창고 화재로 소방관 1명, 2022년 1월 5일 경기 평택 팸스물류센터 신축 공사 현장 화재로 소방관 3명이 순직하면서 일선 소방관을 중심으로 RIT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각 시도 소방본부에선 RIT 운영에 돌입했다. 특히 2021년 경북소방본부와 경북소방학교는 전국 최초로 ‘RIT 특별구조교육과정’을 개설했다. 소방청은 현재 진행 중인 국립소방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RIT 편성ㆍ운영 표준모델을 마련하고 훈련시설 등을 확충할 계획이다.
재난 현장에서 소방관이 고립ㆍ매몰ㆍ실종 등 사고를 당하면 동료를 구조하기 위해 투입되는 RIT. <FPN/119플러스>가 서울 은평구 서울소방학교에서 진행된 1권역 특수구조단 RIT 훈련 현장을 찾았다.
“살려서 돌아오라”… 실전 방불케 한 RIT 합동훈련
추운 겨울이 지나고 곳곳에서 봄을 알리는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3월 2일. 서울시119특수구조단은 서울소방학교에서 중앙119구조본부 수도권119특수구조대, 인천소방본부 119특수대응단, 경기도특수대응단, 경기북부특수대응단과 ‘1권역 특수구조단(대) 통합대응 훈련’을 진행했다.
이번 훈련은 1권역 특수구조단 간 협업체계를 구축하고 고립 소방관 발생 시 구조를 위한 역할 분담과 구조기법을 공유하는 등 현장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마련됐다.
훈련 시나리오
지하철역 지하 2층 현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구조대원이 고립. 광범위한 수색ㆍ구조를 위해 시도 특수대응단 구조대원들이 합동으로 RIT 임무를 수행하는 상황. |
먼저 RIT 지휘관이 임무를 지시한 뒤 수색ㆍ구조ㆍ공기공급팀 등을 편성했다. 수도권119특수구조대는 수색1팀, 서울시119특수구조단은 수색2팀ㆍ공기공급팀, 경기북부특수대응단은 구조1팀, 인천소방본부 119특수대응단 구조2팀, 경기도특수대응단은 구조3팀을 맡았다.
이후 수색팀은 열화상카메라 등 장비를 활용해 위험 요인이 없는지 살피면서 지하철역 내부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구조대원 안전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검색로프)’을 각 구간에 설치했다. 이 장비는 내열성과 가시성이 높은 로프 등으로 구성돼 구조팀이 신속히 고립 소방관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색2팀은 지하철역 지하 1층 개집표기 주변을 수색하던 중 공기호흡기 잔여량이 100㍴에 도달하자 공기공급팀 응원을 요청했다. 이후 공기공급 구역을 설정하고 비상 호흡법으로 산소 소모량을 낮추면서 현장에서 대기했다. 동시에 재난 현장에서 구조대원의 가시성을 높이는 용도로 사용되는 ‘플래시 비콘’을 주변에 설치했다.
‘가이드라인’을 통해 신속히 공기공급 구역에 도달한 공기공급팀은 산소통 등 장비 보관이 가능한 ‘RIT 팩’을 이용해 수색2팀의 공기호흡기에 공기를 공급했다. 이후 해당 구역에 대기하고 수색2팀은 수색을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전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색둘. 지하 2층 수색 중 지하철 내부에서 고립 대원 발견. 의식 없고 공기 잔량 부족으로 공기 공급 실시, 추가 구조팀 지원 바람”
지하 2층 전동차 내부에서 고립 소방관을 발견한 수색2팀은 ‘RIT 팩’을 이용해 공기호흡기에 공기를 주입했다. 시야 확보를 위해선 ‘플래시 비콘’을 주변에 설치한 뒤 지상으로 복귀했다.
전동차 내부에 도착한 구조1팀은 고립 소방관을 ‘패스트보드’에 눕혔다. 패스트보드는 부력재 탈부착이 가능한 바스켓 들것이다. 여기에 로프 등을 묶은 뒤 지하 1층으로 향했다. 고립 소방관을 이송하다 공기 잔량이 250㍴에서 150㍴로 떨어지자 추가 구조팀을 요청하기도 했다.
지하 1층 개집표기 주변에서 임무를 교대한 구조2팀은 신속히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후 구조3팀은 지상으로 이어지는 지하 1층 계단에서 임무를 교대했고 무사히 고립된 소방관을 구출해냈다.
“다시는 동료 떠나보내지 않도록 RIT 확대해야”
이번 훈련에 참여한 구조대원들은 RIT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RIT가 도입되는 추세인 만큼 보급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영후 서울시119특수구조단 소방위는 “이번 훈련은 사고 시 시도 특수대응단 간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통해 동일 전술과 장비로 대응하는 게 목적”이라며 “훈련을 통해 시도 특수대응단별로 어떻게 현장에 임하는지, RIT 훈련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대원 안전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RIT는 구조와 구급 등 모든 소방관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원활히 동료 소방관을 구조할 수 있는 활동”이라며 “현재 특수구조대에서만 RIT를 준비하고 있는데 서울시119특수대응단 모든 소방관이 RIT 중요성을 인식하고 절차와 장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 전파에 노력하겠다”고 했다.
신현석 인천소방본부 119특수대응단 소방위는 “우리나라 소방에서 RIT는 생소한 개념인 데다가 이전까진 인력 부족으로 운영이 힘든 상황이었다”며 “이젠 동료 소방관을 떠나보내지 않도록 RIT를 보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타 시도와 선진국의 RIT 교육 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구조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전 소방관이 RIT 개념과 기술을 익혀 동료 소방관 구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방성수 수도권119특수구조대 소방장은 “1권역 특수대응단 단위로 훈련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훈련을 통해 시도 특수대응단별로 RIT 훈련과 대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됐다”며 “실화재 훈련장에서 RIT 훈련을 진행했다면 교육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이 남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소방관으로서 임무 수행도 중요하지만 살아서 돌아오는 점 역시 중요하다”며 “미국처럼 우리나라 소방에도 위험 상황에 놓이면 메이데이를 외칠 수 있는 환경이 널리 정착되길 바란다. 실제 순직 사례를 기반으로 RIT 훈련을 진행해 더는 동료 소방관이 사고로 순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재웅 경기도특수대응단 소방장은 “쿠팡ㆍ평택 화재를 계기로 RIT 훈련을 진행했지만 1권역 단위 훈련은 없었다. 다행히도 이번 훈련으로 시도 특수대응단별 사용 장비와 협업체계 등에 관한 얘기를 나눠 의미가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경기도에선 소방관 안전 확보를 위한 훈련과 팀 단위 RIT 훈련 등을 기획 중”이라며 “지금까지 특수구조대나 주변 소방관서 구조대를 동원해 RIT를 운영하는 방식이었지만 앞으로는 일선에서 RIT 관련 대원을 지정한 뒤 투입 준비를 하는 동안 특수대응단 또는 주변 소방관서 구조대원들이 현장으로 이동하는 체계가 이뤄지는 게 목표다”고 강조했다.
‘FPN TV’에서 생생한 훈련 현장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최누리 기자 nuri@fpn119.c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4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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