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N 최영 기자] = 11월 9일 소방의 날을 앞두고 62주년 소방의 날 기념식이 지난 8일 세종 정부종합청사 체육관에서 열렸다. 어찌 된 일인지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조차 참석하지 않은 채 진행된 행사는 그렇게 소방만의 잔치로 막을 내렸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영상 축사를 빌려 말하자면 국민이 가장 위험할 때 언제나 그곳에 있는 중요한 공조직이 소방일 텐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소방공무원의 자긍심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 총리의 축사엔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의구심부터 앞선다.
이날 국민의힘 이달희 의원이 던진 메시지를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행정부가 아닌 입법부에 속하는 국회의원이지만 그나마 진정성이 느껴진 건 분명 다행인 일이다.
경상북도 경제부지사 역임 당시 소방 역할을 눈으로 보고 몸소 체감했다는 이 의원은 이날 '소방의 누나'를 자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울먹이며 공언했다. 여당 의원이자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인 그가 이 말마저 던지지 않았다면 아마 소방의 서운함은 더 컸지 않았을까 싶다.
소방의 날 행사는 1963년 내무부 시절 처음 시작됐다. 이후 정부는 1991년 소방기본법에 11월 9일을 소방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올해로 소방의 날이 62회를 맞은 건 바로 과거 1963년을 기준으로 산정한 거다.
하지만 역대 소방의 날 행사 중 장관급 이상의 행정부 인사가 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이번 정권에서 소방의 위치는 과연 어느 밑자락에 붙어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방은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하다. 소방 조직 내에선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심사하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가 열리는 시점에서 정부 주요 인사가 참석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란 말도 나온다.
긍정의 힘이 넘쳐서일까. 이 사태를 합리화하기 앞서 과거 소방의 날 기념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소방에 날 기념식을 찾았다. 2022년엔 이태원 참사로 행사 자체가 취소됐고 2021년은 전해철 행안부 장관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자리를 지켰다. 2020년 땐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진영 행안부 장관이 소방의 날 축포를 함께 쏘아 올렸다.
2019년엔 행사 10일 전 환자 이송을 위해 출동했던 중앙119구조본부 소속 헬기가 독도 인근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기념식을 치르지 못했다.
2018년엔 이낙연 국무총리와 김부겸 행안부 장관이 행사에 참석했다. 2017년 땐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했고 2016년엔 황교안 국무총리와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2015년과 2014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기념식에 왔다.
이는 집권당이 바뀌어서 나타난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건 장관급 이상 행정부 인사가 참석하던 소방의 날 기념식이 올해에는 철저히 외면받았다는 사실이다.
올해에는 화성 아리셀 화재와 부천 호텔 화재로 많은 국민이 숨졌다. 의료 대란으로 인해 119구급대원의 피로도는 날로 높아졌다. 게다가 인천 청라에서 발생한 아파트 주차장 화재는 기술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재난 양상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크게 위협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소방의 역량 강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 소방의 미래 희망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법도 한데 기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국무총리의 축사는 소방공무원의 소방활동 통계를 읊는 것으로 시작해 소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쳤다.
날로 늘어가는 소방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인력 충원과 재원 확보가 시급한데 미래에 대한 밑그림은 티끌만큼도 제시되지 않았다. 더욱이 지난달 21일 윤석열 대통령과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참석한 제79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과 비교해보면 탄식부터 나온다. 소방 조직 내부의 분위기는 아쉬움을 넘어 절망감으로 가득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하루 전 진행한 기자회견 탓에 혼란스럽다손 치더라도 행안부 장관조차 오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일각에선 소방안전교부세 때문이 아니냐는 시각이 나온다. 사실 소방안전교부세의 배분 비율 법 조항을 폐지하려는 행정안전부와 소방청은 요즘 물 밑 전쟁을 벌이고 있다.
행안부는 담배가 유발하는 화재 사고를 고려해 만들어진 이 소방 예산을 포괄적 안전 분야로 쓰임을 넓혀 지자체 쌈짓돈으로 쓰게 해주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소방안전교부세 도입 이후 지방교부세법 시행령에서 정한 고정적 배분 비율 조항을 폐지하려는 것이다.
소방청은 이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예산 도입 취지를 훼손하는 데 더해 신분 국가직 전환과 소방청 독립에도 여전히 부족하기만 한 국가 투입 소방 예산의 비율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어서다.
이 문제는 여야를 떠나 많은 국회의원으로부터 문제 제기를 받고 있다. 시행령에서 정한 배분 비율 조항을 법률로 정하기 위한 개정 법률안은 22대 국회가 들어선 이후 벌써 5개나 발의된 상태다.
하지만 지난 9월 23일 이달희 의원이 주최한 ‘지방 소방재정의 안정적 확보방안’ 토론회에서 행안부는 “시도지사가 관할 지역 재난을 판단해 적절한 재원을 투입하는 게 정책 방향성”이라며 소방안전교부세 배분 비율의 폐지 방침을 사실상 공식화했다.
소방에 힘을 실어주는 국회도, 소방안전교부세 배분 비율 유지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소방도, 행안부로선 달가울 리가 없다.
이런 배경에서 소방의 날 기념식을 외면한 건 아닌지 의심이 가는 건 기자만의 생각일까. 만약 맞다면 요즘 말로 딱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행정안전부 '짜치다'.
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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