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선 소방관이 섹시한 직업으로 묘사되는데
대한민국 소방관의 이미지는 왜 ‘라면 먹는 소방관’인가요?”
미드, 섹시, 라면까지… 열거된 단어들이 범상치 않아선지 감겨있던 눈꺼풀이 모세의 기적처럼 열렸고 음소거 됐던 두 귀도 보청기를 단 듯 명확하게 들렸다.
2015년 초가을, 국민안전처 소속 중앙소방본부(현 소방청)와 해양경비안전본부(현 해양경찰청) 홍보 담당자들이 모인 자리로 기억된다. 마이크를 잡은 서울소방 몸짱 달력을 제작한 소방관은 계속해서 발표를 이어갔다.
“불쌍한 소방관의 모습이 아닌
섹시하고 멋진 소방관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절대적 동기부여가 된 발표를 듣고 짠내 나는 소방관 이미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변화시킬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걸 어느 누군가는 하고 있지 않은가?
안 될 거로 생각하지 말고 나 역시도 멋진 소방관을 만드는 데 손을 보태야겠다는 생각에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럴 때 느끼는 쾌감이 좋다. 변태처럼.
공무원 사회가 대부분 그렇듯 어디 한 곳에서 히트를 치면 여기저기서 벤치마킹을 한다. 사실 좋은 말로 벤치마킹이지 시쳇말로 Ctrl+c, Ctrl+v 아닌가?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에서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비슷한 업무가 많다. 나 역시도 몸짱 소방관에 대한 벤치마킹을 생각 안 한 게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서
“우리도 몸짱 소방관 달력 하나 만들어야지. 만들면 대박일 텐데…”
하지만 화상 환우를 돕는 선한 의도를 가진 서울소방과 나눠먹기식 접근과 복사하기식 업무 추진은 용납할 수 없었다.
‘몸짱 달력이 아닌 소방화보…. 소방의 모든 면을 담을 수 있는 화보를 만들자!’
화재와 구조, 구급 등의 현장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훈련하는 소방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장짜리 보고전을 만들고 쥐꼬리만 한 홍보예산에 거의 무료봉사 수준으로 함께 할 사진작가를 알음알음으로 섭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소방관 모델이 선발되지 않았다. 화보를 찍겠다며 광주소방 전 직원에게 알렸지만 당시 1400여 명의 소방관 중 지원자는 ‘0’명. 외롭고 힘들었다. 하지만 순탄치 않은 진행 과정이 오히려 날 더 흥분시켰다.
한숨도 사치라 생각하며 임용 동기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친분이 있는 선후배를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야말로 읍소였다.
관용차가 아닌 개인차로 눈이 오는 무등산에 오르고 보안 구역인 군 공항에 위치한 소방항공대까지 찾아가 촬영 콘셉트를 짰다.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진작가와 수많은 얘기가 오갔고 모델들의 손짓과 표정까지 컨트롤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누군가는 그런 과정이 있었느냐고 되묻기도 하지만 1년여 간의 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광주소방 첫 화보가 2018년 12월 세상에 나온다.
그렇게 시작된 첫 화보제작이 코로나19 시기까지 이겨내며 2022년까지 4회에 걸쳐 명맥을 이어왔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진을 찍겠다는 지원자가 늘었고 이제는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도 멋진 사진들이 만들어졌다.
소방청과 다른 시도 소방에 자유롭게 공유하도록 해 지금까지도 책자와 리플릿, 플래카드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가끔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 있다.
“광주소방 화보는 서울소방이 제작한 몸짱 달력을 모방한 것일까?”
나는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다. 서울소방 몸짱 달력에서 최초 착안해 기획했지만 몸짱 달력에 없는 전혀 새로운 걸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또 광주소방 화보는 소방의 다양한 분야에서 200% 활용되고 있다. 그러면 새로운 창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모방도 나만의 새로운 색깔을 입히면 창조다.
<광주소방학교 이태영 소방위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광주소방학교_ 이태영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5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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