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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로애락 119] #14 여명이를 만나던 날
광주소방학교 이태영   |   2024.03.04 [10:00]

소방관이 되면 화염을 헤집고 위기에 처한 시민을 구조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쌀을 불려 밥을 안치고 파송송 계란국을 끓이는 영락없는 주방장 아니, 소방관이었다. 주황색 제복엔 그을음 대신 고춧가루와 함께 시금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화장실 청소에 사무실 허드렛일까지 할라치면 심장을 멎게 하는 출동벨에 만사 제쳐두고 소방차에 올라야만 했던 좌충우돌 황인 소방관의 28년 전 이야기다.

 

1995년 가을 건들바람에 첫사랑의 날카로운 추억이 떠오를 법하지만 여유는 사치였고 24시간 2교대 근무는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이제 막 시보를 뗐다지만 황인 소방관은 여전히 막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구급 출동벨이 울리면 구급차, 화재 출동벨이 울리면 소방차에 올라타야만 했던 황인 소방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출동벨이 울린다.

 

“임신부가 진통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속히 출동 바람!”

 

임신부, 그리고 진통까지. 뼛속 깊이 박혀 버린 두 단어에 황인 소방관은 두 다리가 풀렸다. 애써 현실을 외면한 채 설마 출산 상황까진 오지 않을 거라 믿으며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는 불안한 마음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빗물을 걷어내던 와이퍼가 작동을 멈춰 황인 소방관은 위험천만, 달리는 구급차 밖으로 몸을 내밀어 유리창을 수건으로 닦아야만 했다. 심지어 그 낮은 방지턱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작은 진동에도 뒷문은 하마의 입처럼 문을 ‘쩍’하고 벌렸다.

 

우여곡절 끝에 현장에 도착했을 땐 황인 소방관의 바람과는 사뭇 다르게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음… 아… 너무 아파요”

“소방관님, 아내가 아프다는데 어떻게 좀 해주세요.

빨리요 빨리”

 

비명에 가까운 산모의 절규와 남편의 흥분된 목소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주황색 제복은 소방관을 슈퍼맨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황인 소방관은 굳게 닫았던 입을 떼며

 

“아이고 남편이 애 낳아요. 흥분하지 마시고 

제가 애를 몇 번을 받아봤는데 뭔 걱정을 그렇게들 하실까?

남편분 얼른 냄비에 물 끓여서 가위 소독이나 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주옥(?)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때론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지 않던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산파가 되기로 마음먹은 황인 소방관. 그는 응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응급의학 서적에서 본 내용을 되뇌며 현장을 차분하게 진두지휘했다.

 

사실 호기심에 출산 과정을 세세하게 그림으로 묘사한 장면들을 다른 응급상황 대처보다 몇 번을 더 봤기에 자신 있었다.

 

깨끗한 수건을 산모 엉덩이에 깔고 산모의 자궁을 확인하자 아이의 머리가 보였다. 빠른 이송보다는 현장에서 출산을 유도해야만 했다. 황인 소방관이 산파처럼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며 산모에게 긴 호흡과 함께 출산을 유도하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이는 탯줄을 붙들며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산모님 아이 건강하게 나왔습니다. 

이제 탯줄만 자르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변변한 분만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명주실로 탯줄을 묶고 소독된 가위로 자르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황인 소방관도 그 순간만큼은 두려웠다. 엄마와 아이를 이었던 통로란 생각이 들었던 걸까. 그런데 그때였다.

 

“아따 소방관 총각 지금 뭐다고 있소? 

폼이 탯줄 한 번도 안 잘라 봤제? 맞지라?”

 

구수한 사투리를 쓰고 현관문을 뜯을 기세로 박차고 들어온 아주머니의 등장에 황인 소방관의 동공은 바늘구멍처럼 작아졌다. 알고 보니 옆 동네 살고 있던 시어머니가 연락을 받고 도착한 것이다. 이렇다 할 대답도 못 하고 멈칫하고 있을 때 시어머니는 순식간에 탯줄을 잘랐다.

 

“내가 애를 몇이나 났는지 모르지라? 

나는 밭일하다가 혼자서 애 낳고 혼자서 탯줄도 자른 사람이여. 

너는 뭐 이런 일 갖고 바쁜 119까지 불렀다냐? 

아무것도 아니다”

 

심각한 상황에서 구수한 농담에 현장은 웃음바다가 됐고 아이를 품에 안은 산모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현장이 정리되고 다시 소방서로 복귀하던 그때 어둠은 저만큼 밀려나고 시뻘건 태양이 떠올랐다. 창문을 바라보며 황인 소방관은 동료 소방관에게 말했다.

 

“그 아기를 여명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여명. 건강해라 여명아!”

 

지금은 첨단 장비는 물론이고 응급구조사 등의 자격을 갖춘 구급대원만 구급차에 탑승할 수 있지만 황인 소방관이 출동했던 90년대는 전문자격을 갖춘 구급대원이 없거나 턱없이 부족해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응급처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구급차는 지금은 단종된 K 사의 베스타를 개조해서 운영됐다. 말이 구급차지 군용 들것에 바퀴만 덩그러니 달려 있었던 시대로 현장에서의 응급처치보다는 신속한 이송이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남다른 열정을 가진 황인 소방관은 평소 병원 응급실에 이송할 때면 대학 동문을 운운하며 의사들에게 궁금한 건 물어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응급실에 마련된 책을 뒤적였다. 시간에 쫓겨 제대로 볼 수 없으면 간호사 눈치를 보며 복사기를 돌려 비번 날에도 도서관을 찾아 공부했다. 그렇게 정리한 분량이 대학노트 3권 분량이었다고 하니 황인 소방관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광주소방안전본부 황인 소방정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광주소방학교_ 이태영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4년 3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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