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의 어느 날,
어색하기만 한 주황색 제복을 이리저리 만져보며 119안전센터에 첫 출근을 마친 나를 팀장님이 불러 세웠다.
“자네, 운전은 잘하나?”
“네! 군대에서 1호차 운전병으로 전역했습니다”
“그래? 그럼 소방차 운전도 문제없겠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내 대답이 실수였음을 알게 됐다. 나를 앞장세우며 차고로 향한 팀장님은 몇 개월 뒤 불용처분 예정인 96년식 소방차(아시아자동차)를 보여주며
“자네가 이 차를 운전해 줬으면 해.
조작법은 이따 다른 직원이 알려 줄거네”
수동미션에 브레이크는 밀리기 일쑤였고 군용 트럭과 견줄만한 승차감은 덤이었다. 애초에 후방 카메라, 전후방 감지 센서와 같은 편의 사항은 기대할 수조차 없는 그야말로 구닥다리 소방차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군용 트럭처럼 비가 새지는 않았다. 감사하게도….
그렇게 나는 화재진압을 하는 소방관이 아닌 소방차를 운전하는 소방관이 됐다. 그리고 24시간 2교대 근무자들에게 주어지는 쿠폰 같은 휴가, 다시 말해 두 달에 세 번 주어지는 순번 휴무로 구급대원이 자리를 비우면 구급차를 운전하는 역할까지 하는 멀티(?) 소방관이 됐다.
늘 그렇듯 큰 사고는 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발생하는 법. 구급대원의 부재로 그날은 정신없이 구급차를 운행하다가도 불이 나면 다시 소방차에 올라 화재 현장으로 향했다. 힘든 하루에도 내색을 할 수 없던 그때 그 시절,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구급 출동이 찾아온다.
“구급 출동! 구급 출동! 엄마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합니다”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니 뇌에서는 스트레스 대응 시스템이 작동해 코르티솔이 분비되고 아드레날린이 작동돼 심장은 펄떡펄떡 뛰기 시작했다.
구급차에 올라 흥분한 나를 보고 선배 구급대원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해.
별 일 아닐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나보다 2년 빠른 선밴데 왜 그렇게 든든해 보이는지. 뭔가 이 사람은 현장을 다 아는 것처럼 존경스러웠다.
구급 장비와 들것을 들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복도를 지나자 신고자인 아이와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의 말대로 엄마의 흰 블라우스에는 핏빛 가득한 선홍색 얼룩이 배어 있었다.
입에서도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코였다.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고 누워있는 엄마는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아이고, 술 마셨네요. 술 마셨어!”
선배 구급대원은 엄마의 생체징후를 확인하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살펴보니 어지럽게 술병이 놓여 있었고 그중 영롱한 선홍빛 자태를 뽐내는 복분자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추측건대 복분자를 마시고 토한 뒤 쓰러졌는데 전후 상황을 전혀 모르는 아이는 그저 엄마가 피를 토하고 쓰러진 줄로만 안 것이다.
차마 “엄마가 복분자주를 마시고 토했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그저 별일 아니라며 아이를 안심시킨 후 출동은 마무리됐다.
며칠 뒤 이런 에피소드를 공유하자 주변 구급대원도 비슷한 출동을 나간 적이 있다며 “우린 적어도 복분자주 먹고 토하진 말자”고 때아닌 다짐을 하며 왁자지껄 떠들었다.
광주소방학교_ 이태영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12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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