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공사 현장에서 낙상한 환자를 이송했습니다. 이송 도중 병원에서 정맥로 확보를 요구했습니다. 정맥로 확보를 시도했고 성공했음을 확인한 후 작게 한숨을 쉬면서 누가 보지 못하도록 주먹을 쥐고 자축했습니다.
구급대원이라면 일상과 다름없는 이 평범한 일이 제겐 너무나도 특별했습니다. 전 한동안 정맥로 확보를 할 수 없는 구급대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계에 ‘입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부상 또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나 주위 시선에 대한 지나친 의식 등이 원인이 돼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골프선수들의 퍼팅실수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용어였으나 지금은 흔히 야구에서 투수가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다거나 수비수가 공을 일루수에게 던지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을 때 사용합니다. 그런 입스가 절 찾아왔습니다.
언젠가 연달아 정맥로 확보를 실패한 시기가 있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근무해 병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습니다. 정맥로 확보에 실패하고 나서 환자가 병원 도착하기 전에 상태가 악화되면 어떡하나 크게 걱정하곤 했습니다.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마저 생기니 정맥로 확보에 대한 부담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다 정맥로 확보를 하는 순간 자체를 겁내게 됐습니다. 정맥로 확보 입스가 온 겁니다.
이겨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정맥로 확보를 못 하는 구급대원이 필요할까?’
그렇게 좌절의 시간이 이어지던 때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서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전도유망하고 야심 넘치던 내의원 유세엽은 시침을 잘못해 임금의 죽음에 휘말리게 됩니다.
하지만 유세엽의 아버지는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 구해냅니다.
때마침 출세를 위해 소홀히 대하던 유세엽의 아내는 출산 중 사망하고 이 일련의 사건에 죄책감을 느낀 유세엽은 그 죄책감과 부담감으로 침을 놓지 못하는 의원이 됩니다.
그렇게 내의원을 나온 그는 계 의원을 만나 그의 충고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의원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면서 의술을 새롭게 인식하고 마침내 침술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심리적 질병까지 이겨냅니다.
이 책을 읽으며 한 편으로는 마음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침을 하지 못해 당황하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나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한편으론 살짝 안심했습니다. ‘어쩌면 이게 나만의 문제는 아니구나’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시침을 하지 못함에도 많은 환자에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정맥로 확보를 하지 못하는 구급대원도 다른 분야에 집중하면 쓸모가 있지 않겠냐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구급대원의 역할을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급대원의 역할 중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환자가 중환자인지 아닌지 파악하고 적절한 병원 선정을 하는 건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 뒤 환자 상태파악이나 환자의 잠재적인 위협을 판단하는 걸 공부하고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했습니다.
또 소설 속 주인공처럼 환자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맡아보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마음을 응급구조할 수 있는
응급구조사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구급차에 타는 환자나 보호자 중 신체뿐 아니라 마음의 아픔을 지니신 분이 많았습니다. 오랜 지병으로 마음이 지친 환자, 환자의 간병으로 피로해진 보호자, 자주 아픈 환자로 인해 늘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보호자 등 구급차 안은 언제나 하소연으로 가득했습니다.
그걸 최대한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역할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환자나 보호자는 작은 위로를 얻지 않을까, 치료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심리상담에 관심이 생겨 2년 전에는 사이버대학 상담심리학과에 편입하기도 했습니다.
못하는 정맥로 확보에 집중하기보단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극 중 주인공이 침술이 필요할 때마다 침술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며 정맥로 확보가 필요할 땐 동료나 병원에 정맥로 확보를 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맥로 확보가 필요한 환자를 만났습니다. 정맥로 확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저에게만 있었습니다. 용기 내 시도했고 아주 오랜만에 성공했습니다. 그날의 벅찬 감동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구급대원이라는 직업으로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을 읽으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저처럼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져 자책하거나 내가 잘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드시는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충북 충주소방서_ 김선원 : jamejam@korea.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11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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