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한 번쯤 서 본 사람이라면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ㆍ사고에 일희일비할까?
사람들은 모두가 망각이라는 장점이자 단점을 갖고 있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 당시 절실했던 마음마저도 깨끗이 잊는다.
소방관이 되고 7년 차 구급대원이던 2006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최근엔 5명 중 1명이 갑상선암일 정도로 흔하고 착한 암이지만 17년 전만 해도 그리 흔하게 볼 수 있진 않았다.
하필 이 시기에, 이제 내 나이 30대 초반인데… 암에 걸렸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임신을 위해 몇 해 동안 노력하고 실패를 반복하던 중 드디어 어렵게 아이가 찾아왔는데 암 수술과 치료를 해야 한다니… 내겐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임신 중단을 결정하긴 매우 어려웠다. 가장 행복해야 할 10개월간 불안한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선택과 고민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2007년 1월 건강한 아이를 만나게 됐다.
불행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몰려오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상선암 수술을 했고 한 달 뒤 갑작스레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이 암 수술과 상까지 치르고 나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방사선 치료와 육아를 병행해야 했다. 어찌 됐든 슬프고 힘든 시간이 흘러는 갔다.
2007년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절절하게 아프고 힘든 해였다. 무엇이 붙잡아 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땐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 좌절하고 슬퍼할 시간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폭풍 같은 일을 경험한 후 2008년 2월 상담심리 학부를 다니게 되면서 나의 내면을 먼저 치유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하지 못하고 회복되지 않던 마음의 상처들이 상담심리를 전공하며 스스로 비워지고 치유가 돼 가는 게 느껴졌다.
그땐 잘 몰랐지만 상담을 공부한 후 동료를 상담하고 관련 연구를 해보니 내가 경험한 공감이라는 이름의 가장 크고 중요한 위로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졌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공감하라. 그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함께 아파해 줘라’가 위로와 공감, 치유는 물론 모든 것의 시작임을 말하고 싶다.
2007년 9월 갑상선암 수술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 당일 아침, 앞가림도 못 하는 돌도 안 된(그 당시 7개월) 아이에게 영상으로 유서를 남겼다.
안전한 수술이라고, 테이블 데스는 확률이 낮다고 해도 결국 암 수술이고 이후 상황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서는 꼭 남겨야 할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어딘가 폴더 안에 저장돼 있을 그 유서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열어 볼 일이 없길 바라본다.
수술 대기실 침대에 옷을 벗은 채 누워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수술 준비를 하던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아니 왜 이렇게 우세요?”
“아이 때문에요”
“아이가 몇 살인데요?”
“7개월이요”
간호사는 얇은 시트를 가져와 덮어주면서 진심을 담아 걱정하는 목소리로 “정말 걱정되시겠네요” 하며 내 손을 꼭 잡아줬다.
그날 그 수술실 간호사가 “아이~ 별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거예요”라든가 “괜찮아요. 잘못되지 않을 거예요”라고 위로했다면 더 서러웠을 것 같다.
당시 기억을 되돌려보면 그건 결국 공감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걱정하고 슬퍼하는 일을 공감해주며 같이 걱정하는 마음을 나눴다는 게 정말 큰 위로였고 힘이 됐다.
물론 수술을 잘 마치고 지금까지 부작용으로 종종 힘들긴 해도 잘 지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7개월이던 아이도 17살이 됐다. 17년 전인 그때를 기억하면 내 손을 잡고 걱정되는 마음을 함께 공감해준 그 간호사님 덕에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상대를 위로하고자 하면 상대방의 입장이 돼서 진심으로 공감해줘야 한다. 그냥 단순하게 ‘잘 될 거야! 좋은 날이 올 거야’라고 말해주는 위로는 사실상 크게 와닿지 않는다.
물론 좋은 의도에서 위로하는 말이겠지만 항상 상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성공적으로 위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걸어 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인디언 격언이 있다. 온전히 상대의 처지가 돼 보기 전에는 그에 관해 쉽게 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렇듯 상담 밖 현장에서 섣부른 위로와 조언, 충고는 오히려 상처가 되곤 해 위험할 수 있다.
불필요한 희망 고문을 던져주는 것보다 그 순간 함께 슬퍼하고 힘든 상황을 함께 공감해줄 때 사람들은 ‘위로받는다’고 느낀다.
우선 위로하고 싶은 건지, 공감되지 않지만 공감하는 척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으로는 ‘뭘 그런 거로 힘들다고 해!’라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잘 되겠지. 좋은 날 있겠지’라고 할 때 위로받기보다 오히려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온전히 공감하고 위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를 위해 성공적인 위로를 해 주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상대방의 입장이 돼 마음으로 공감해줘야 한다.
‘힘들었구나, 얼마나 속상했을까’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을 위해 우산을 들어주는 것도 좋지만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게 진정 함께 해 주는 공감이자 위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경기 파주소방서_ 이숙진 : emtpara@gg.go.kr
<본 내용은 소방 조직의 소통과 발전을 위해 베테랑 소방관 등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2019년 5월 창간한 신개념 소방전문 월간 매거진 ‘119플러스’ 2023년 10월 호에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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