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N 최영, 최누리 기자] = 지난 8월 1일 인천 서구 청라동 아파트 지하주차장 화재 당시 169개에 달하는 소방시설이 고장 나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관할 소방서는 법령상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수리 기일을 연기해준 사실이 드러났다.
또 이 같은 무차별적인 불량 소방시설의 연기 조치 행태가 전국에서 만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소방의 안일한 예방행정 관행으로 인해 소방법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용혜인 의원(기본소득당)과 <FPN/소방방재신문>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 화재 당시 불량 소방시설의 방치 배경을 조사한 결과 관할 소방서의 소방시설 점검 관리와 감독 부실 문제가 숨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소방시설 자체점검은 ‘소방시설 설치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소방시설법)’에 따라 특정소방대상물의 관계인, 즉 건물주나 사업자ㆍ관리인 등이 소방시설을 일정 주기마다 점검하도록 한 의무 제도다.
점검 결과 소방시설이 고장나거나 설치되지 않는 등 불량 사항이 있으면 관계인은 법에 따라 10~20일 이내(수리ㆍ정비 10일, 교체 20일) 시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방대상물 관계인은 자체점검 결과보고서와 함께 불량사항을 수리하겠다는 이행계획을 관할 소방서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관계인은 이 이행계획에 따른 기간 내 수리를 완료하고 다시 소방서에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용 의원실 조사에 따르면 불이 난 청라 아파트의 경우 지난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소방시설 점검업체를 통해 소방시설 자체점검을 진행했다. 당시 발견된 소방시설 불량 사항은 소화ㆍ경보ㆍ피난구조ㆍ제연설비 등 무려 169가지에 달했다.
해당 아파트 측은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자체점검 실시결과 보고서와 함께 불량 소방시설을 7월 29일까지 고치겠다는 ‘이행계획서’를 7월 10일 인천서부소방서에 제출했다.
그런데 소방시설 불량 수리를 약속한 29일을 5일 앞둔 7월 24일 아파트 측은 소방서에 이행완료일 연기를 신청했다. 그러자 인천서부소방서는 신청 당일 28일을 더 늘려줬다. ‘그 밖에 관계인이 운영하는 사업에 부도 또는 도산 등 중대한 위기가 발생해 이행계획을 완료하기 곤란한 경우(소방시설법 시행령 35조 제1항 4호)’를 연기 신청 승인 근거로 삼았다.
현행법상 이행계획 완료 기간 연장 사유는 엄격하게 제한된다. ‘소방시설법 시행령’ 제35조 1항을 보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상 재난이 발생한 경우(1호) ▲경매 등 사유로 소유권이 변동 중이거나 변동된 경우(2호) ▲관계인의 질병, 사고, 장기출장 등의 경우(3호) ▲관계인이 운영하는 사업에 부도나 도산 등 중대 위기가 발생해 이행계획 완료가 곤란한 경우(4호) 등이다.
하지만 당시 해당 아파트가 인천서부소방서에 최초 제출한 ‘소방시설등의 자체점검 결과 이행계획 완료 연기신청서’에는 연기신청 사유가 어느 조항에 해당하는지 명확히 체크돼 있지 않았다. 업체 선정과 계약이 늦어져 8월 20일까지 완료하도록 연기해달라는 내용만 적혀있다.
그런데 인천서부소방서가 공문에 첨부한 ‘연기신청 결과 통지서’엔 오히려 ‘공사 물량 과다로 인한 기간 필요’, ‘공사업체 간 일정조율ㆍ비용분담 조정 등 필요’ 등 연기 사유가 별도로 기재됐다. 법령상 사유를 충족한다고 보기엔 어려운 내용인 데다 인천서부소방서가 신청서에도 없는 특정 사유를 임의로 정해 허가해줬다는 게 용 의원 지적이다.
인천서부소방서가 자체점검 이행계획을 연기해준 이틀 뒤 해당 아파트에선 화재가 발생해 주민 22명이 병원치료를 받았고 880대 이상의 차량(전소 42, 부분소 45, 그을음 피해 793대 등)이 피해를 입었다. 단수ㆍ단전, 연기 피해 등으로 인해 161세대 입주민 470여 명은 무더위 속에 임시대피소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신청만 하면 전부 연기?… 소방 예방행정 내려놨나
이 같은 무차별적인 불량 소방시설의 수리 기일 연기 행태는 전국의 소방 예방행정에서 만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용혜인 의원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3년(’22년 12월~’24년 8월)간 ‘소방시설 자체점검 이행계획 완료 연기 신청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체 신청 5551건 중 99%에 달하는 5495건이 승인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광주ㆍ대전ㆍ세종ㆍ전남ㆍ창원 등 5개 소방본부와 소속 소방서에선 소방시설 자체점검 이행계획에 대한 완료 연기 신청을 받은 즉시 사유를 불문하고 100% 모두 승인했다.
승인 사유별로 보면 ‘소방시설법 시행령’ 제35조 1항 4호 사유가 93.5%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소방시설 공사 일정 조율이나 비용 조달 등의 이유는 경영상 중대 위기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소방은 이행계획 완료 기간 연장 사유로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사실상 이행계획의 도입 취지는 불량 소방시설의 수리가 늦어져 화재 시 소방시설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현실에선 제구실을 못 하는 셈이다.
불량 소방시설의 신속한 수리가 이뤄지지 않아 피해를 키운 사건은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2017년 12월 21일 29명이 숨진 제천 스포츠센터 참사 당시 화재 발생 약 3주 전 스프링클러설비 밸브 폐쇄 등 다수 지적사항이 점검 과정에서 확인됐다. 하지만 화재 당일까지 소방서에 관련 사항이 보고되지 않아 불량 시설은 불이 날 때까지 방치됐다.
소방서가 자체점검 보고서를 제출받는 시기는 제천 화재 이후 30일에서 15일로 대폭 축소됐지만 정작 수리 기한이 손쉽게 연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불량 소방시설의 방치 문제는 나아진 게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불량 소방시설 수두룩 ‘청라 아파트’… “안일한 소방 행정이 원인”
더 심각한 문제는 대형 피해가 발생한 인천 청라 아파트의 소방시설 자체점검에서 확인된 불량 사항엔 화재 시 피해를 키울 수 있는 치명적인 소방시설 고장 내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청라 화재 당시 점검 결과보고서를 보면 화재 시 자동으로 소방서에 신고하는 자동화재속보설비가 고장 나 있었다. 소방 조사자료에 따르면 이날 아파트의 화재수신기에는 오전 6시 10분께 최초 화재 신호가 들어온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소방서에 신고가 이뤄진 건 5분 뒤인 15분이었다. 화재속보설비가 정상이었다면 ‘5분’이란 골든타임을 단축할 수 있었던 셈이다.
또 옥내소화전설비와 습식 스프링클러설비의 압력 스위치ㆍ압력계가 고장 난 데다 주차장 B1층 9번 구역에 설치된 준비작동식 스프링클러 구역은 화재 시 신호를 받아 밸브를 열어주는 ‘솔레노이드밸브’가 연동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화재 시 피난로를 안내하는 유도등이 고장 난 곳도 59곳에 달했다.
화재 시 엘리베이터실과 함께 있는 전실에 일정한 바람을 불어넣어 연기 확산을 막는 제연설비의 핵심 시설인 급기댐퍼 모터가 불량한 곳도 30곳이나 됐다.
특히 329동과 334동은 불이 난 지하 1층 제연설비 급기댐퍼의 모터도 불량했다. 334동 지하 1층은 화재가 발생한 전기차 바로 맞은편에 있던 동으로 상층부에 연기가 다량 유입되면서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게다가 불이 나면 방화문을 자동으로 닫아주는 자동폐쇄장치 자체가 불량하거나 화재 신호와 연동되지 않는 불량도 30개나 됐다. 제연설비의 성능확보를 위해 불이 나면 자동으로 창문을 닫아주는 창문 자동폐쇄장치 불량 역시 38개에 달했다.
관리자가 화재 초기 감지 신호를 받은 뒤 스프링클러설비와의 연동 기능을 정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고장 난 채 방치된 소방시설의 총체적 부실 문제를 묵과하고 넘어가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용혜인 의원은 “자체점검 이행기한 연기는 사유가 엄격하게 정해졌지만 소방에선 법령상 요건에 해당하지 않아도 이를 무작정 연기해 주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청라 화재 피해가 커진 원인 중 하나는 소방의 안일한 예방 행정 관행으로 자체점검 결과에 따른 보수가 제때 완료되지 못한 거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어 “‘소방시설법’ 개정 취지는 소방의 관리ㆍ감독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체점검을 강화해 이ㆍ삼중 예방 제도를 갖추기 위함”이라며 “자체점검에서 확인된 불량 사항을 법에 따라 엄격하게 시정하고 동시에 이행계획 제출 시 공사업체 계약과 자금 조달 계획을 미리 일정 부분 확인하는 등 제도개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행계획 체제 전환한 자체점검 제도… “예방행정 후퇴”
소방이 자체점검 제도를 이행계획 제출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예방행정을 후퇴시킨 사실도 드러났다.
소방청은 지난 2022년 말 관련법 개정 이후 자체점검 결과에 따른 후속 조치를 ‘조치명령’ 방식에서 ‘이행계획 제출’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전까지 자체점검 후 소방관서가 ‘조치명령’을 요구했다면 지금은 민간이 점검 후 불량 소방시설을 기한 내 조치하겠다는 이행계획을 제출하고 불량 시설까지 직접 조치한 뒤 그 결과를 다시 소방관서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특히 과거 소방은 자체점검에서 확인된 불량 사항의 조치명령 이후 소방시설 수리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담당 소방공무원이 직접 현장을 찾아 확인하던 체계까지 없앤 것으로 확인됐다.
동시에 행정조치 수준도 약해졌다. 최초 불량 소방시설에 대한 자체점검 보고 이후 조치명령을 내리면서 벌금 처벌을 경고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이행결과가 제때 제출되지 않더라도 과태료 처분을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완화했다. 이마저도 연기신청 시 99%가 허가되고 있다.
실제 인천 청라 아파트의 경우 2022년 소방시설 자체점검 땐 관할 소방서가 점검 보고서 결과에 따라 조치명령서를 발부하고 이를 정당한 사유 없이 위반할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반면 이행계획 체계로 변경된 지난해부턴 자체점검 결과 이행계획 완료 기간 통보란 공문을 아파트 측에 보내면서 ‘과태료 300만원 이하가 부과될 수 있다’고 안내 수준의 공문을 보냈다.
과거 시정명령을 통해 징역 또는 벌금형을 경고했던 것과 달리 과태료 부과를 알리는 데 그치는 등 예방 행정을 완화해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화재안전을 위한 관련 제도를 더욱 강화해 소방대상물 관계인의 경각심을 높여도 모자랄 판에 소방 스스로가 행정력을 약화시킨 것과 다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용혜인 의원은 “소방이 스스로 행정력을 포기하는 형태로 관련법을 개정하는 등 소극 예방 행정을 조장하거나 최소 방치한다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며 “국민을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야 하는 소방의 예방 행정을 기초부터 다시 잡지 않으면 결국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현행법에도 소방의 의지만 있다면 과거처럼 현장점검과 보완, 조치명령을 통해 화재 예방행정에 적극 나설 수 있다“며 ”소방청 스스로 의지를 갖고 화재 예방행정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관련 법 개정까지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최영, 최누리 기자 young@fpn11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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