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N 최영, 박준호 기자] =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천 호텔의 완강기 대다수가 엉터리로 설치돼 있던 사실이 <FPN/소방방재신문> 취재결과 드러났다. 소방예방 행정 체계와 민간 전문 점검의 총체적 부실성이 확인되면서 완강기 설치 실태부터 조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2일 발생한 부천 호텔 화재 당시 불길은 810호에서 최초 시작됐다. 사망자 7명 중 5명은 건물 내부에서 연기 등에 질식해 숨졌다. 807호 투숙객 두 명은 소방이 지상에 설치한 에어매트로 피난했지만 모두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이를 두고 희생자들이 완강기를 사용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사고 이후 언론과 소방 등에서는 완강기 사용법을 앞다퉈 알리는 등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하지만 해당 호텔의 완강기는 사용조차 어려울 정도로 곳곳에 심각한 부실이 있는 것으로 취재결과 확인됐다. 사용요령보다 이미 설치된 완강기의 건전성를 먼저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FPN/소방방재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해당 호텔 객실에는 ‘간이완강기’가 설치돼 있었다. 화재 시 피난을 위해 쓰이는 이 완강기는 비상 상황에서 창문을 통해 건물 아래로 피난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다.
소방관련법에 따라 성능 검증을 받아 숙박시설 등에 의무 설치되는 완강기는 일반 ‘완강기’와 ‘간이완강기’로 나뉜다. 두 제품의 차이는 연속적 사용 가능 여부다. 일반 완강기는 사용자가 한번 타고 내려가더라도 또 다른 사용자가 연속해서 쓸 수 있다. 하지만 간이완강기는 한 사람이 내려오면 즉각적인 재사용이 불가한 ‘일회용’이다.
보편적으로 한 객실에 두 명이 입실하는 숙박시설 특성상 이 같은 간이완강기를 하나만 설치하는 건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한 명이 피난할 경우 다른 사람은 내려올 수가 없어서다.
과거 이런 문제를 <FPN/소방방재신문>이 집중보도하면서 <관련기사 - [긴급진단] 화재시 피난 생명줄 ‘완강기’, 문제는 없나> 소방청은 지난 2015년 관련 규정을 고쳤다. 연속 사용이 가능한 완강기를 객실마다 한 대를 두거나 간이완강기를 설치할 경우 두 개 이상을 두도록 했다.
이 법규 강화 이전까지만 해도 간이완강기는 객실마다 하나씩만 갖춰도 됐다. 2003년 3월 건축허가를 받은 부천 호텔에는 과거 법령에 따라 간이완강기를 객실마다 한 대씩만 설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 개의 간이완강기만 있었더라도 위법은 아니다. 하지만 안전성 논란은 불가피하다. 결과적으로 이번 화재에서 투숙객들이 간이완강기를 사용했더라도 두 명 중 한 명은 완강기 사용이 불가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스프링클러설비나 화재감지시스템처럼 소급적용되지 못한 법규 개선책이 완강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김치통인가?… 사용법도 표시 안 된 황당한 완강기
더 황당한 건 실제 객실에 설치돼 있던 간이완강기의 모습이다. 부천 호텔의 일부 간이완강기는 케이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김치통처럼 생긴 플라스틱 밀폐 용기에 담아져 있었다. 이 같은 형상은 <FPN/소방방재신문>이 확보한 화재 현장 사진은 물론 객실 이용객들이 과거 인터넷 블로그에 남긴 게시물들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소방산업기술원의 형식승인을 받아 유통되는 완강기에는 규정에 따라 반드시 사용안내문을 표기해야 한다. 대부분의 제품에는 완강기 몸체가 아닌 전용 케이스에 이를 기재하고 있다. 누구나 사용법을 익혀 올바른 피난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플라스틱 밀폐 용기에 담긴 간이완강기는 사용안내문도 없이 보관돼 있었다. 대다수 국민이 완강기 사용법을 모르는 현실에서 사용안내문조차 없다면 과연 누가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게다가 마치 김치통처럼 보이는 케이스 탓에 완강기라는 사실조차 쉽게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20년 넘은 완강기… “믿을 수 있을까”
부천 호텔에 설치된 간이완강기 대다수는 20년이 넘은 노후 제품들로 확인된다. 유사시 창문으로 뛰어내려 로프와 기계장치에만 의존해야 하는 특성상 과연 신뢰할 수 있겠냐는 의구심을 낳는다. 실제 소방시설의 점검이나 소방관서의 화재조사 과정에선 완강기를 사용하는 등 실질적인 성능 테스트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 소방시설관리업계의 관계자는 “완강기는 제대로 비치된 상황만 확인하지 기구를 실제 타볼 수는 없지 않겠냐”고 귀띔했다.
이런 노후 소방시설을 교체하지 않았다고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완강기의 내용연수를 정한 별도 법규가 없어서다. 소방청(과거 소방방재청)은 지난 2010년 화재 시에만 사용되는 소방용품 전체에 대해 내용연수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도 도입을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소방방재청의 의지 부족으로 도입이 무산됐다.
이후 소화기 폭발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소방관련법에 내용연수 규정이 신설됐다. 그러나 소화기에 대한 규정만 만들면서 다른 소방용품에 대한 사용연한은 아직도 부재한 실정이다.
이 같은 소방용품 내용연수 부재 문제는 소방시설 점검 또는 관리 과정에서 노후 제품의 교체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고장이 나지 않는 이상 오래됐다는 이유로 건축주에게 뚜렷한 교체 근거 기준을 제시할 수가 없어서다. 노후 소방용품 사용으로 인한 피해 방지와 소방시설의 온전한 성능유지를 위해 적정 연수를 시급히 설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영주 경일대학교 소방방재학부 교수는 “한 번 설치되면 언제 사용할지 모르는 게 소방용품인데 적정한 수명 주기와 관리는 필수”라며 “정부차원에서 국민에게 소방시설의 기능 유지를 위한 적정 주기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노후 소방시설의 방치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내용연수에 따른 무조건 교체가 부담이 된다면 교체 주기가 도래한 제품의 성능 재확인을 통해 사용기한을 연장해주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8층에 9m 완강기라니… 소방조사도, 민간 점검도 ‘엉망’
취재 과정에선 해당 호텔에 설치된 대다수 간이완강기가 건물 층수와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제품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확인됐다. 소방예방 행정은 물론 민간 점검에서조차 이를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됐다.
<FPN/소방방재신문>이 확보한 사진을 보면 해당 호텔의 8층 객실에는 9m용 간이완강기가, 9층에는 10m, 21m짜리 제품이 설치돼 있는 등 층수와 어긋나게 구비돼 있었다.
완강기의 로프 길이는 1층당 3m로 산정된다. 해당 호텔에 4층이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8층에는 최소 21m(3m×7층), 9층에는 24m(3m×8층) 제품이 설치됐어야 한다. 만약 로프가 짧으면 외벽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려지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관련 법규인 ‘피난기구의 화재안전기준’에선 ‘로프의 길이는 부착 위치에서 지면 또는 기타 피난상 유효한 착지 면까지의 길이로 할 것’이라고 규정한다. 부연하면 완강기는 반드시 타고 내려가야 하는 지면 길이에 맞도록 설치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같은 완강기의 길이 문제는 소방예방행정과 민간 점검 체계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소방청이 행정안전위원회 윤건영 의원실(더불어민주당, 구로을)에 제출한 해당 호텔에 대한 화재안전조사 내역에 따르면 경기소방은 지난 2022년과 2023년 화재안전컨설팅을 각 1회씩, 올해 2월 16일에도 화재안전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확인된다.
최근 3년 동안 이뤄진 이 같은 조사와 컨설팅에서 해당 호텔은 모두 ’양호‘ 판정을 받았다. 간이완강기의 로프 길이 문제와 사용법 표기가 없는 속칭 ’김치통 간이완강기‘를 지적한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겉핥기식 조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민간 전문업체가 실시한 법정 점검도 엉터리이긴 매한가지였다. 지난 2019년부터 최근까지 민간업체가 실시한 소방시설 자체점검은 아홉 번에 달한다. 소방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소방시설 자체점검은 ‘종합점검’과 ‘작동점검’으로 나뉘어 일 년에 두 번씩 실시된다.
지난 5년 동안 실시된 모든 점검에서 간이완강기는 문제로 보고되지 않았다. 날림점검이었음을 방증한다. 해당 간이완강기가 건물 사용승인 시점에 설치됐음을 감안하면 무려 20년 동안 엉터리로 방치돼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윤건영 의원은 “소방관서의 예방행정과 민간 자체점검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며 “완강기 사용방법을 대대적으로 알릴 게 아니라 이미 설치된 완강기의 실태를 면밀하게 조사해 문제성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경기도소방재난본부와 소방청은 윤건영 의원실이 요구한 부천 호텔의 완강기 설치 여부와 위법성에 대한 자료 요구에 “수사 중인 사항”이라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하는 등 관련 정보를 은폐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영, 박준호 기자 young@fpn11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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