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PN 최영 기자] = 우리나라에서 소방 출신 정치인이라는 말은 참 낯선 얘기입니다. 19년 동안 분야 전문 기자로 살아오면서 소방 관련 인물이 국회에 입성한 건 21대 오영환 소방관이 처음이었습니다. 전례가 없었죠.
하지만 오 의원은 1년 전 일찌감치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많은 소방인이 그의 국회 재입성을 기대했던 터라 그 실망감과 안타까움은 더욱 컸습니다. 헌정 사상 처음이었던 소방 출신 국회의원이 이룬 성과가 놀라울 만큼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화재 피해의 주범이라 불릴 만큼 오랜 세월 고치지 못한 가연성 샌드위치 패널을 퇴출하도록 ‘건축법’을 고쳤고 경찰 등 타 부처 반대에 부딪혀 제정하기 어려웠던 ‘화재조사법’, 국민의 화재 안전과 직결되는 ‘화재 예방ㆍ소방시설 설치와 유지관리 법률’의 분법, 소방관 등 공무원이 위험 환경에 상당 기간 노출된 뒤 부상이나 사망했을 때 공무상 재해로 우선 추정하는 ‘공상추정법’에 이르기까지. 이런 법안들 하나하나는 거대 정부 부처 이견에 맞서 끈질기게 싸워 얻어낸 것들입니다.
지난해에는 국가가 유일하게 소방에 투입하는 8682억원(인건비 4829억, 사업비 3853억) 규모의 소방안전교부세 배분 비율(소방 75%, 안전 25%) 조항의 폐지를 시도한 행정안전부의 행태를 견제하며 국회 내 현안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덕분에 교부비율의 일몰 시기를 규정한 특례 조항은 1년 연장됐고 이 기간 내 재검토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소방을 대표하는 오영환이란 인물이 국회에 없었다면 가능했을까요? 기자는 단언컨대 ‘NO’라고 확신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국회에는 수많은 법안이 제출됩니다. 정부 각 부처로부터 요청받은 법안이나 의원실 차원에서 구상한 다양한 법안이 발의되죠. 하지만 국회의원 개인의 실적만을 위해서 또는 누군가의 요청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제출되는 게 많습니다. 이렇게 발의된 법안들의 실질적인 심사는 법안을 대표 발의한 의원의 의지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우선순위가 정해지죠.
그저 실적에 그치는, 그저 부탁받고 발의한 법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까요? 당연히 미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나 법안에 반대하는 부처나 이해 세력이 있다면 그 법안은 회피 1순위가 되기 일쑤죠.
즉 우선순위가 아닐뿐더러 절실함 역시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분야를 이해하고, 법안의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며 내놓은 법안이 아니어서죠. 그저 공감하는 것과 법안의 본질을 이해하는 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소방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라면 어떤 곳이라도 마찬가지겠죠.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가 국회에 필요한 이유입니다.
따지고 보면 소방관 출신 오영환 의원이 의정활동을 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의정부의 민심을 챙겨야 하는 지역구 의원이자 소방ㆍ재난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로서 동시에 활동했으니까요. 아마 그는 지역과 소방이라는 두 가지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부담감과 압박감이 상당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소방ㆍ재난 분야의 수많은 숙원 법안을 통과시키고 그릇된 정책이나 정부의 견제 역할까지 해줬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안한 건 자칫하면 이런 소방ㆍ재난 분야 정치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22대 총선이 걱정입니다. 거대 양당은 물론 대다수 정당은 소방ㆍ재난 분야의 전문가를 단 한 명도 영입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미래’라는 군소정당만이 소방의 인물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비례대표 후보로 조종묵 초대 소방청장을 영입한 거죠. 이 당을 이끄는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지난 21대 총선 과정에서 오영환 의원을 더불어민주당으로 영입하고 전략 공천했다고 알려집니다.
사회 안전과 소방ㆍ재난 분야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해주기 시작한 정치권의 관심은 아쉽게도 더불어민주당이라는 거대 정당에서 군소정당으로 옮겨온 모양새입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권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 인물이 단 한 명에 그치긴 했지만 어쨌든 등장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번 22대 총선은 소방ㆍ재난 분야 결집력의 시험대가 돼 버렸습니다. 새로운미래는 지금 각종 여론조사에서 비례대표 지지율이 1~4%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비례대표 투표에서 최소 3% 이상이어야만 비례 의석 하나를 차지할 수 있는데 조종묵 전 청장은 1번도 아닌 2번입니다. 더 많은 표가 모이지 않는다면 국회 입성이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분야 종사자들의 관심과 성원이 이어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수많은 소방ㆍ재난 분야 종사자가 분야 정치인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비례 표를 던져준다면 말이죠.
큰 걱정은 분야 대표 인물이 비례대표 후보로 등장한 이번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아마 앞으로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소방 분야 대표 주자를 다시 보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정치권의 관심이 저조한 소방 분야의 인물을 내세워봤자 분야 내에서는 관심조차 없다는 인식이 쌓일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다음 총선, 그다음 총선에서도 소방ㆍ재난 분야의 인물을 보긴 어렵겠죠.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아주 냉정한 곳이니까요.
아마도 조종묵 전 청장이 국회에 입성한다면 오영환 의원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과는 다르게 이 분야를 대표하는 비례대표로서 ‘올인 정치’가 가능한 여건이기 때문이죠.
주변에선 요즘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언론인이 왜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소방 비례대표 인물을 설명하면서 그를 알리는 데 열을 올리냐고 말이죠.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자가 몸담은 <FPN>과 <소방방재신문>, <119플러스>는 소방ㆍ재난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 언론입니다. 전문 언론의 존재 이유와 가치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 분야의 소식을 알리는 것과 함께 분야 발전을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이 분야에 사회적, 정치적 관심이 절실하다는 것 또한 몸소 체감해왔습니다. 문제를 발굴하고 미비한 제도를 개선하는 것 그리고 올바른 정책 방향을 제시해 종사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 이게 바로 전문 언론이 해야 할 기본 책무일 것입니다. 분야의 발전을 앞당기기 위해 소방ㆍ재난 대표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 역시 전문 언론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거대 양당과 다른 군소정당 어느 곳일지라도 소방을 대표하는 인물을 22대 총선 주자로 발탁했다면 당색을 떠나 그들을 응원하고 알리기 위해 전문 언론인의 역할에 충실했을 거란 사실입니다. 지금은 단 하나의 당에서만 후보를 냈다는 사실을 누구도 망각해선 안 됩니다.
어느덧 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소방ㆍ재난 분야 종사자들이 분야를 대표하는 정치인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과연 소방의 앞날이 밝아질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국회에 소방ㆍ재난 분야 전문가를 입성시키는 일. 그 캐스팅보터는 누구도 아닌 소방ㆍ재난 분야 종사자 모두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최영 기자 young@fpn119.co.kr
<저작권자 ⓒ 소방방재신문 (http://www.fpn119.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