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한 ‘폭탄게임’을 기억하시나요. 시간이 지나면 ‘펑’ 하고 터지는 폭탄을 주고받으며 다양한 문제를 푸는 게임이었죠.
최근 소방청에서 입법 예고한 내용을 보니 딱 이 ‘폭탄게임’이 생각납니다. 2018년 1월 39명이 사망하고 153명이 다친 밀양세종병원 참사 후 정부는 모든 병원급과 입원실을 갖춘 의원급 의료기관에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을 소급 설치토록 관련 법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당시 병ㆍ의원계의 강한 반발도 있었지만 정부는 이 규제를 강행했습니다. 재정지원을 요구하며 반대입장을 보인 병ㆍ의원계를 고려해 3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3년이 다 된 지금, 소급 기한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정부가 돌연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습니다. 설치기간을 2026년까지, 무려 4년 4개월 연장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1년도 안 돼 세종병원 참사를 겪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사고 이전 달엔 29명이 숨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도 겪은 터였죠. 사고의 재발을 막겠다는 강한 의지로 1년 6개월 만에 법을 고쳤습니다. 여기까지만 볼 땐 사고 대책에 최선을 다했다는 문재인 정부의 명분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임기 말 소급 기간을 연장하는 법령 개정에 따라 병원 화재 대책이라는 과제는 고스란히 윤석열 정부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유예기간은 윤 대통령 임기를 5개월도 남기지 않은 시점까지 이어질 전망입니다. 대통령 임기의 91.6%에 달하는 기간입니다. 문재인 정부로부터 넘겨받은 이 ‘폭탄’은 새 정부의 임기 중 언제 터질지도 모를 일이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사고 이후 대책을 마련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임기 말 기간을 연장한 이 상황이 아이러니합니다. 소급 기한 연장 내용을 담은 입법 예고는 문재인 정부 때 하고 법령을 개정ㆍ공포하는 건 시기상 윤석열 정부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만약 연장된 유예기간 중 세종병원 참사와 유사한 사고가 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윤석열 정부는 관련 규제를 연장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했다는 책임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새 정부가 규제를 푼 것과 다름없는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유예기간 내 소방시설을 갖출 수 있는 일이라고도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소방청에 따르면 지난 3년의 유예기간 동안 소방시설을 소급 설치한 병원은 약 35%(2413개소 중 853개소)에 그칩니다. 기간에 다다랐지만 10곳 중 7곳이 소방시설을 안 갖춘 셈이죠. 안 한 건지, 못한 건지는 모를 일입니다.
게다가 기한 유예 소식에 하던 공사를 멈추거나 이미 해놨던 계약을 파기하는 병원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국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병원이 사업을 거부하는 촌극까지 벌어집니다. 유예기간 내에 미리미리 소방시설을 갖추는 병원이 있을지 의문이 드는 이유입니다.
병ㆍ의원계는 소급 설치 연장 사유로 코로나19를 언급합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현재 코로나 확진자는 한 달 전에 비해 90% 감소한 수치를 보입니다. 시기상조란 지적도 있지만 이달부턴 실외 마스크 착용도 해제됐습니다. 또 정부는 코로나19 병상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죠.
병ㆍ의원계의 입장이 아예 이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펜데믹 기간에 국민을 위해 많이 힘써주셨죠. 그런데 코로나19 유행은 2년 반도 채 되지 않는 데 반해 추가 유예기간은 자그마치 4년 4개월에 달합니다.
그 사이 세종병원 같은 화재 참사가 반복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정부도, 의료인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기자는 윤석열 정부에 묻고 싶습니다. “이 폭탄, 감당할 자신 있으십니까?”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에는 소방 선진화 정책으로 화재 사망자 수를 대폭 줄이겠단 목표가 담겼습니다. 만에 하나 병원 화재가 발생해 피해가 나온다면 규제를 푼 것도 모자라 실패한 국정과제가 될 건 자명한 일입니다.
과연 병원 화재 위험을 떠안은 이 오묘한 상황을 윤석열 정부가 알고는 있을지 궁금합니다. 새 정부가 들여다봐야 할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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